문학동네가 2010년 펴낸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체스 이야기’ 한국어판 표지. 츠바이크가 스스로 생을 끝내기 전 쓴 마지막 소설이자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1942년 사후 출간됐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합니다.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것은 정신을 못 차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아직 정신이란 것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정신은 남이 차려줄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도 “정신 차려” 하고 등짝을 때릴 수 있을 뿐 자식의 정신을 대신 차려주지는 못합니다. 그 사람의 정신은 온전히 그 사람 내부에 있다는 것이죠. 오늘 소개할 책은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체스 이야기’입니다. 르노삼성sm7노바 이 남자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정신을 차린다’는 것의 의미가 더욱 복잡해집니다.
독방 감금을 버티며 자신과의 체스를 시작
이야기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하는 여객선을 탄 한 남자의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남자는 이 배에서 세계 체스 챔피언 미르코 첸토비치와 우연히 마주치게 됩니다. 첸토비치는 교양 없고 속물적인 급여압류신청 인물입니다. 이 배에는 또 한 명의 체스 고수 B박사가 타고 있습니다. 남자는 B박사가 체스를 배우게 된 사연을 듣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인 변호사였던 B박사는 게슈타포에 체포돼 독방에 감금됩니다. 완벽하게 폐쇄된 방에 갇힌 그는 모든 감각이 마비됐습니다. 정신을 가진 인간은 생각하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무(無)의 상태를 견딜 수 없지요. 나치가 노린 공동담보해지 것이 바로 이 약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아무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그저 완벽한 무의 상황에 세워두었던 겁니다. 잘 아시겠지만, 지상의 어떠한 것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인간 영혼을 압박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B박사는 감금된 방에서 우연히 체스 교본 한 권을 발견합니다. 이 책은 B박사의 정신적 버팀목이 됩니다. 이 소설에 르노삼성자동차 서비스센터 서 가장 강렬한 장면은 혼자 블라인드 체스를 두는 B박사의 심리상태 묘사입니다. 체스란 두 사람이 검은 말과 흰 말을 각각 움직이며 진행되는 게임입니다. 그런데 검은 말과 흰 말이 동일한 사람이라면 기묘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하나의 두뇌가 뭔가를 알아야 하는 동시에 또 몰라야 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사고가 가능하려면 의식이 완전히 분열돼야 합니다. 스위치를 소자본창업아이템 작동하듯 뇌의 일부 기능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중 삼중으로 상상의 차원을 열어야 합니다. 상대의 한 수 앞을 내다보고 나의 수를 계산하려면 상상의 단위가 기하급수로 늘어나게 됩니다.
극도의 정신력을 발휘한 B박사는 완전한 자아의 분리를 이뤄냈습니다. 그러자 게임의 즐거움이 욕망이 되었고 욕망은 다시 강박과 광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분리된 두 자아는 서로에게 격분하고, 질까봐 불안해합니다. 잠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체스 생각뿐이었습니다. 검은 말이 이기면 흰 말이 복수전을 요구합니다. 상대에게 으르렁대며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이런 게임에 빠진 사람은 제정신일 수 있을까요? 결국 광기에 휩싸여 난동을 부린 B박사는 정신질환 진단을 받고 의사의 호의에 의해 풀려납니다.
‘나’를 믿지 못하는 불안한 눈빛의 ‘나’
다시 여객선 선실, B박사는 첸토비치와 체스 대결을 벌입니다. 영악한 첸토비치는 B박사의 약점을 간파합니다. 첸토비치의 시간끌기 공격 앞에서 B박사는 다시 한번 무의 상태로 끌려 들어갑니다. 감금된 방에서 무기력하게 나치의 신문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그때처럼, 첸토비치가 수를 놓기 전까지 B박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혼자 두는 블라인드 체스에서는 경험할 수 없었던 상황입니다. 첸토비치는 일부러 체스를 두다 말고 딴청을 피우며 B박사를 자극합니다. B박사의 눈에 광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식은땀이 줄줄 흐릅니다. 그가 야수로 변하기 직전, 남자가 B박사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기억하세요.” B박사는 깜짝 놀라며 정신이 돌아옵니다. “결국 제가 또다시…?”
비인간적인 나치의 고문에 맞선 B박사의 사투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인간 정신의 취약성도 보여줍니다. 주체적인 정신을 지키고자 했던 그는 분열된 자아로 인해 또 다른 정신적 위기에 빠졌습니다. ‘결국 제가 또다시’라는 B박사의 말은 발작 상태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종종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관찰당한다는 것을 알면 곧장 다른 얼굴을 드러냅니다. 그때마다 내 안의 다른 자아가 그런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진짜 나’는 무엇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자아란 자신과 맺는 관계입니다. 자아가 건강하다는 것은 자신과 사이가 좋다는 뜻입니다. 분열된 자아는 나와의 관계를 불안하게 합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죠. 불안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 무엇을 알지 못할 때 형성됩니다. 극단적인 자아의 분열 상태에서는 내가 나를 알 수 없게 됩니다. B박사의 고통은 외부 세계와 맞서기 위해 끝없이 내부 세계의 불안을 품어야 하는 인간 정신의 곤란함을 보여줍니다.
고통 내부와 바깥 사이의 지독한 괴리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에서 지킬 박사는 이 문제에 관해 독특한 해법을 생각해냈습니다. 나쁜 마음을 한 자아에 몰아넣으면 나머지 한 자아는 순수하게 선해질 수 있다고 믿은 것이죠. 그래서 자신의 악을 한데 몰아넣어 하이드라는 자아를 창조해냅니다. 하지만 하이드의 폭주를 막지 못한 지킬 박사는 결국 자신과 하이드가 하나의 운명임을 깨닫습니다. ‘체스 이야기’에서 B박사는 나치의 고문에 맞서 자아분열이라는 비인간적인 대응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분열된 정신으로 인해 스스로 내파됐습니다. 검은 말과 흰 말은 서로를 이기기 위해 으르렁댔지만 결국 하나의 인간이었습니다.
자아를 만들어낸 동기는 달랐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두 경우 모두 폭주하는 자아를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지킬 박사는 하이드를 죽이기 위해 자살했고, B박사는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결국 ‘내가 되기’인데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무엇도 될 수 없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관계는 나와의 관계입니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의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첸토비치가 시간끌기 공격을 하는 순간 B박사는 플래시백에 빠졌습니다. 플래시백이란 기억에 매개된 폭력적인 사건이 지금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나타나 다시 폭력에 노출되는 경험을 말합니다. 첸토비치의 무례에 화가 난 승객들은 B박사의 고문 경험을 듣고도 그에게 첸토비치의 콧대를 꺾어줄 것을 요구합니다. 승객들은 고문의 기억을 불러내는 행위가 당사자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괴리는 사건 내부에 있는 사람과 외부에 있는 사람 사이에 근원적인 이해불가능성을 드러냅니다.
일본의 사상가 오카 마리는 사람이 무언가를 ‘떠올린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람이 생각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사람에게 도래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주체는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억’이라고요. ‘정의’를 위해 동원되는 타인의 고통에 관해 생각해볼 일입니다. 사건은 당사자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생생한 현재를 살아갑니다. 누구도 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증언’을 강요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억’이 이와 같이 갑자기 도래하는 것에 대해 ‘나’는 철저히 무력할 수밖에 없고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기억’이란 때때로 나에게는 통제 불가능한 것으로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나의 신체에 습격해오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기억·서사’, 오카 마리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왼쪽)가 1935년 나치 병사들을 사열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동시대로부터 위로받지 못한 츠바이크
위대한 관찰자 슈테판 츠바이크는 인간 정신에 관한 깊은 통찰이 담긴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체스 이야기’는 그의 소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B박사의 비극은 츠바이크가 살았던 시대의 암울함을 떠올리게 합니다. 첸토비치는 인류에 대한 나치의 공격을, B박사는 그에 맞서는 인간 정신의 위기를 각각 상징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난 츠바이크는 히틀러의 침공 뒤 고향에서 추방당해 브라질로 망명을 떠납니다. ‘체스 이야기’가 출간된 해, 츠바이크는 아내와 함께 목숨을 끊습니다. 혼란스러운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인간성을 지키려 안간힘을 썼던 그는 끝내 인류의 자멸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첸토비치와의 대결에서 패한 뒤 B박사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는 어쩐지 츠바이크의 마지막을 생각하게 합니다.
“부끄러운 저를 용서하십시오, 체스에서 저를 시험하는 짓은 이번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동시대의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던 츠바이크를 위로했던 사람은 300년 전 사람 몽테뉴였습니다. 종교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똑바로 서 있었던 몽테뉴는 나치의 시대를 살았던 츠바이크에게 경외의 대상이었습니다.
“분별력이 있는 인간은 아무것도 잃을 게 없어. 시대의 사건들은 네가 거기에 동참하기를 거부하는 한 네게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어. 네가 스스로 명료함을 지닌다면 시대의 광증은 진짜 곤궁이 아니야.” ―‘에세’, 몽테뉴
‘체스 이야기’를 읽으며 인류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비인간적인 세계에 살아갈 수 없었던 작가의 슬픔을 느꼈습니다. 이 소설은 남겨진 인류에게 건네는 츠바이크의 자기고백이자 위로가 아니었을까요. 그가 몽테뉴에게 받았던 위안을 우리는 츠바이크에게서 받습니다. 참혹한 시대에도 인간성을 지켜나가는 정신적 전통을 이어받습니다.
정주식 팟캐스트 ‘발굴독서단’ 진행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좋은 책은 나를 곤란하게 한다. 나를 곤란하게 하는 책 이야기. 4주마다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