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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빈유세솔 작성일25-09-30 23:29 조회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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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56회를 맞은 동인문학상은 독자와 함께 하는 한국 문학의 축제입니다. 매달 독회를 통해 추천작을 쌓아올린 뒤 연말에 그해 수상작을 선정합니다.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정명교·구효서·이승우·김인숙·김동식)는 서울 중구 을지로 한 식당에서 월례 독회를 열고 최근 출간된 소설을 검토했습니다. 9월 독회 추천작은 강보라 소설집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문학동네)와 공현진 소설집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문학과지성사)입니다.
다음은 독회 심사평 전문.



강보라 /ⓒ송시영





/문학동네 국민행복기금 개인회생





공현진 /ⓒSICA





/문학과지성사


정명교·문학평 모집직종 론가



정명교 문학평론가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소셜 보헤미안’의 부유하는 몸의 조각들
사건을 풍경으로 만드는 무언가는 무엇인가? 그 밑바닥에는 ‘구경’에 대한 탐구라는 원천적 무한도전스위스 인 욕망이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구경’은 일차적으로는 물론 ‘구경 간다’고 할 때의 ‘구경’을 가리킨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에 의하면 “흥미나 관심을 가지고 봄”이다. 이 구경은 시각적 즐거움을 겨냥한다. 그런데 왜 이런 하찮은 즐거움을 추구하는가? 실은 이 즐거움에 대한 욕망 뒤에 은은하고도 끈질긴 배경으로 작용하는 좀 더 카드대환대출조건 본질적인 욕망이 끈끈이처럼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배경은 김동리가 ‘제3휴머니즘’이라는 기치 아래 ‘구경적 삶’의 탐구를 주장했던 것과 같은 의미에서의 ‘구경(究竟)’이다. 시각적 즐거움은 절대적 차원에 도달하고 있다는 환상에 의해 도파민을 투여받는다. 풍경을 보면서 시시때때로 ‘오, 너무 예쁘다!’라는 탄성을 발하는 건 약물의 도관이 열렸다 닫히는 순간 u보금자리론 중도상환수수료 과 일치한다.
그런데 배후의 구경은 표면의 구경을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느슨하게 풀어준다. 거기에 배후의 위력이 있다. 왜냐하면 배후의 권능을 표면의 주체들에게 전승해 줌으로써 표면이 일약 활기를 띨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구경꾼들은 구경(究竟)의 환상을 전유하면서 세계를 지배하는 놀이를 즐기게 된다.
강보라의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일군의 문화인들의 문화적 삶을 통해 저 풍경-구경의 역학을 충실히 구현하고 있다. 이 문화인들의 삶이 절대적 구경에 대한 욕망을 배후에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문화가 단순히 삶의 부산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 안에 녹아 있다는, 아니 있어야 한다는, 모종의 당연성을 자연스럽게 장착하고 있다는 데서 확인된다.
필자는 최근 한 정신분석 잡지(Topique, No164, 2025)에서 정치의 정신병리학으로 유명한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의 어떤 제사(題詞)를 읽게 되었는데,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사랑, 노동, 인식은
우리 삶의 원천들이다.
그러니 그것들을 통치해야 한다
이 제사처럼 강보라적 인물들은 일과 휴식과 삶과 삶에 대한 이해와 삶의 만족을 특정한 문화나 예술 안에 집약시키고 통합함으로써 ‘사랑, 노동, 인식’이 하나 되는 삶을 충만히 누린다.
이런 삶을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옛날의 명칭이 문득 생각이 난다. ‘보보족(Bobos)’. 스스로 고급한 문화적·예술적 취향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며 자신들의 우아한 인생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한 가지 더할 게 있다면, 보보스의 삶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라면, 강보라적 인물들의 문화적 취향은 폭넓은 사교생활을 통한다는 점이다. 필자는 오늘날의 문화에 익숙지 못해서, 이런 부류를 무어라고 하느냐고 A.I에게 물었다. A.I는 ‘보보스’로부터 파생된 다양한 족속들을 나열하다가 ‘사교생활’이라는 정보를 넣자, 곧바로 ‘소셜 보헤미안(Social Bohemians)’이라는 용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풀이하였다.
기존 보보족의 보헤미안 감성에 사교적 네트워킹 능력을 더한 현대적 변형
예술적 취향을 공유하면서도 커뮤니티 중심의 활동을 즐김
예: 문화살롱 운영, 예술가 후원, 창작자 네트워크 참여
아하! 이들의 문화생활은 자신들의 일과 삶과 사랑을 통치할 뿐만 아니라 타인들의 그것들도 관리하는구나!
그러나 실제로 그런 삶이 가능할까? 이런 삶은 엄청난 에너지와 치밀한 계산 능력을 요구한다. 양자 컴퓨터를 동원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체력 쇼티지가 일어날 것이다. 가령, 누군가 자신을 짐승이라고 외치면서 미친 듯이 춤을 춘다고 하자. 그에 호응한 뭇사람이 따라서 군무를 춘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진짜 짐승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선동한 사람을 따라 ‘브레이크 댄스’를 출 능력이 있는 사람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머리를 땅에 박고 헤드 스핀을 훌륭히 실연한다고 해서 그가 초인적 능력을 가진 괴물로 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삶은 오로지 앞에서 말한 어떤 절대적 경지에 대한 환상에 견인되어 있을 뿐이다. 실제의 삶은 그 기둥에 견인되어 저마다 제정신을 모르고 돌아가는 회전 그네의 각각의 의자들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삶은 전체에 대한 환상 속에 갈가리 찢겨서 세상의 흐름 속에서 이리저리 부유하거나 휘날리거나 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 삶들은 실상 전체를 흉내 낸 파편들, 즉 무수한 시뮬라크르의 산만한 조합들이다.
강보라의 소설들은 딱 거기서 멈춘다. 어떠한 해석도 호오의 감정도 없다. 즉 엿보는 시선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제목을 통해 작가의 역할이 충실한 재현임을 슬그머니 가리키고 있다. 그럼으로써 이 소설은 한 세상의 풍경을 그대로 판을 떠서 독자에게 제시한다. 이 존재들의 삶이 산만하게 흩어진 조각들의 부유와 휘날림인 것처럼 소설 속 에피소드들은 유의미한 연관이 없이 맥락을 구성하지 못한 채 중구난방으로 표류하고 있으며, 그들이 충실히 몰입하는 사교생활도 타인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통째로 옮기려는 의지를 동반한 생체험이 아니라, 오로지 ‘비교’ 혹은 ‘비교 우위’라는 이차원 평면 위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것이다.
즉 이 삶들에 대한 해석이나 감정은 없다고 방금 말했는데, 그것은 읽는 시선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고, 내부적으로 이 삶들은 온통 해석과 판단으로 점철되어 있다. 바로 ‘문화’라는 깃발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해석과 비교와 판정. 그리하여 이 판에는 문화와 예술의 포장지들에 싸인 존재의 토막들이, 바로 그 포장지들을 통해 어떤 통일성이 생의 안전과 행복을 보장해 준다는 믿음 속에서, 우발적인 지표들을 통해 서로를 견주면서 부딪치고 멀어지면서 정처 없이 흘러간다.
소설가가 냉정하게 혹은 정직하게 재현하고 있는 이 풍경이 정말 현대인의 삶인가? 그 질문에 대해서는 독자가 답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독자야말로 현대인인 것이고(‘옛날의 독자’나 ‘미래의 독자’도 있으나 그들은 기능이 다르다.), 그로부터 현대인을 둘러싼 논쟁이 일어나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현대인의 삶인가?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인식과 상상의 틈새에서 멸망을 조율하는 말, 말, 말
아무도 잘못하지 않았다. 모두가 성실하게 제 삶을 살았다. 성실하다 못해 악착같았다. 그런데 사고는 불현듯 일어나고 누군가 다치거나 죽었다. 세상의 모서리가 시나브로 부서져 내리고 있다. 그래. 어차피 세상은 멸망하게 되어 있어.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는 제목으로 소설집을 낸 젊은 작가의 눈에 세상이 이렇게 비치는 게 무서운 것일까? 당연한 것일까? 한 가지 질문이 더 있지만 그건 생략하겠다. 무서운 거라면 독자는 곧 닥칠 ‘폼페이’를 자신의 뇌 안으로 옮기면서, 뇌 안의 이 모델이 안구를 뚫고 현실 속에서 재현될까? 아니면 두정엽의 살그머니 벌어진 어느 틈새를 타고 연기처럼 날아가 버릴 것인가?
필자는 후자 쪽에 내기를 걸 터인데, 왜냐하면 세상에 대한 작가의 부정적 인식에는 사실적 인식과 상상적 인식이 묘하게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인식에는 철저한 계산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를 체념하는 태도를 수반한다. 그런데 이 사실 세계는 앞에서 보았듯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망해 가는 과정이다. 이런 상태의 심각한 문제는 멸망에 대한 각성이 일어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과정 자체가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멸망화를 자동적으로 받아들일 확률이 크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멸망을 느끼게 하는 사건들을 직접 겪는 사람들의 경우는 다르다. 재앙이 난데없이 그들에게 닥치고, 전혀 예기치 않은 손실을 입는 것이다. 바로 이로부터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는 제목에 대한 반발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반발은 무기력하다. 사건은 산만하게 흩어진 채로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듯 보이고, 사건을 겪는 인물들은 예측도 못 했을 뿐만 아니라, 무대책이며 이해 능력도 없다. 따라서 그들의 대응도 충동적이며, 상황을 타개할 전략을 만들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암담한 분위기 안에 무언가 신선한 움직임들이 있다. 그 움직임은 두 가지 방향의 운동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는 이런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화자’의 해석적 움직임이다. 멸망을 향해 다가가는 세상의 과정을 바라보는 눈이 있다. 이 눈으로 보니, 세상이 망해가는 과정이 뚜렷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일종의 각성의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 눈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을까? 고지식하게 물으면 대답을 얻을 수 없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단서는 이런 정황을 화자가 고안해 냈다고 가정하는 데에 있다.
요컨대 이 상황은 화자 혹은 화자를 조정하는 작가에 의해 고안된 공간이다. 이 공간 안에 역시 화자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인물이 신선한 움직임들을 보탠다.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현실의 폭력에 희생당하면서도 순수한 마음과 태도를 끝끝내 지키는 사람들이다. 베이비시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녹’, 사출성형기에 직원이 끼어 죽은 사고 이후 충동적으로 사출성형기를 끄다가 권고휴직을 당한 ‘주호’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이런 ‘순진성’의 인물은 소설사에서 수시로 출몰하곤 한다. 정찬의 「완전한 영혼」의 ‘장인하’는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이런 인물형은 현실 속에서 존재하기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 내에서 ‘바로미터’ 이상의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즉 상징적 가치를 넘어 현실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진심밖에 없는 사람’은 ‘진심에서 멈춘 사람’이다. 이 외에 소설들에서 흔히 등장하는 외골수적 인물들은 도덕적 가치를 갖지 않고 오히려 시대적 ‘상흔’이나 강박관념을 지시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현실적 가치를 획득한다. 가령, 윤흥길의 「봉무제씨」의 주인공이 그런 경우다.
작품을 ‘판단’하는 자리에서 작품을 구성하는 과정을 비교적 지루하게 설명한 까닭은 이런 류의 작품에서 문학적 음미는 작품의 내용을 따라가는 데에 있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서이다. 이건 현실 반영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다. 문학적 가치는 리얼리티, 즉 현실에 대한 절실한 정도에 대한 인지가 아니라, 현실을 해석하는 방식의 효과에서 나온다.
공현진 소설의 흥미는, 이 모의된 현실의 ‘순진’과 ‘멸망’의 간극이라는 현실 인식을 말의 차원으로 옮겨 놓고 있다는 데서 나온다. 이 작품들 전체에 관류하는 힘은 모두 ‘말’에 모여지고, 그 밖의 소통 행위(가령, 글이나 행동)는 말의 특징적 양상으로 나타난다.
말은 무엇인가? 말의 기능은 두 종류로 극단적으로 갈라진다. 그것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는 『요한복음』의 언명처럼 지시와 금지로 이루어진 ‘명령’으로서 기능하는 한편, 시의 원형으로 알려진 ‘디에게시스’에 대해 플라톤이 내린 정의처럼 ‘순수한 마음의 토로’로 나타날 수 있다. 공현진의 소설들은 바로 이 명령으로서의 말과 ‘가슴의 언어’라고 지칭할 수 있는 ‘토로’로서의 말 사이의 첨예한 대립을 표출한다. 게다가 명령으로서의 말은 말 그대로 명령으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아주 다양한 스핀오프(파생 형식)를 통해 집요하게 생산된다는 것을 증빙하는 장면들(가령, 말은 ‘공고문’과 같은 글로도 발전하며, 신체적 폭력이라는 행동으로도 격발된다)과, ‘토로’로서의 말이 빈번히 침묵으로 후퇴하는 광경을, 천의 한쪽이 찢겨 나가는 것 같은 양태로 보여줌으로써, 말의 폭력성과 무기력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독자 스스로 체험케 한다. 화자의 해석적 시선은 이 스펙트럼의 개개 양상에 대한 독자의 감각을 이성적 이해 쪽으로 이끈다. 그 시선은 두 종류의 말이 어지러이 얽히는 광경에 대해 객관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해와 엉뚱하다는 인상과 호기심, 그리고 서로 융합되지 않고 묘하게 섞이는, 동감과 조소와 연민의 색조를 띤 마음의 물결들을 흘러가게 한다.
말에 대한 탐구는 오늘날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첨언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은 말의 포화시대이자, 동시에 말의 폭력성이 극대화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공현진의 소설은 오늘날 말의 사회적 지배를 성찰케 하는 데 아주 유효한 장치가 될 수 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말의 열린 가능성과 말과 글의 긴장이 펼치는 또 다른 언어의 지평에 대한 안목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은 명령과 토로 사이에 ‘대화’를 두고 있다. 이 대화는 명령과 토로를 조율하면서, 아주 다양한 양태와 기능을 가질 수 있다. 이 소설들에는 무수히 많은 대화가 출현하지만, 그것들은 각각의 독백들로 닫힌 대화들이다. 다른 한편으로 말과 글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와 글의 개방성과 조직성이라는 양축에 의해 생산되는 가변성으로 인해 글은 단순히 말의 압축이나 명령의 알박기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언어 차원을 만들 수도 있다. 글이 공고문이나 전단지의 수준에서 그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소설은 글로 ‘씌어지는’ 것이지 말로 ‘발성되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하기로 하자.
구효서·소설가



소설가 구효서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강보라의 소설들은 어딘가 직접적인 데가 있다. 그것이 회화라면 물감의 돋을무늬마저 만져질 듯하다. 관념보다는 오감에서 파생되는 언어들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상상의 언어들이 머리가 아닌 손끝에서 나오는 것 같다. 사물이 생각으로 가기 전, 보이고 들리는 단계에서 강보라는 그것을 곧바로 언어화한다. 따라서 추상의 여지가 그만큼 적어지며 직접적인 힘이 생긴다. 그런 걸 생생하다고 하고 살아 있다고도 한다.
웬만한 배포가 아니고서는 소설의 언어를 이처럼 다루지 못한다. 작가들은 문예문의 특징인 다의성을 좇는다. 판정하지 않고 질문하기 위해서며,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 그리한다. 필자의 경우에는 표현력의 한계를 다의성의 모호함 뒤에다 숨기기도 한다.
그런데 강보라는 인물이면 인물 사건이면 사건이라는 실물을 그야말로 실물답게 빚어서 독자의 눈앞에 딱 세운다. 뭔가 들이대는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기로도 보인다. 그러니 독자는 꼼짝없이 붙들려 오도 가도 못하고 그의 소설과 대면할 수밖에 없게 된다.
어떤 사태인가가 이때부터 비롯된다. 그림이 그렇듯이 소설도 세상을 그린다. 그 세상은 이른바 반영된 세상으로서 작가에 의해 이미지화된 사물이자 세계다. 반영된 세계로서의 작품에는 그러나 상반된 긴장이 길항한다. 길항하는 긴장은 독자와 관객을 이야기와 이미지에 빠져들게 한다.
빠져든다는 건 꼼짝 못 하게 사로잡힌다는 정지의 뜻도 되지만 더 깊이 들어간다는 운동성을 지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가(독자도)는 망설이게 된다. 생생함으로 사로잡(히)는 데서 멈출까, 아니면 더 깊이 들어갈까. 망설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생생함은 또렷하고 확연한 거라서 어떤 두려움도 주지 않지만, 더 깊은 것은 확연하지 않아 어둡고 모호하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정뿐만 아니라 불안도 매혹의 충동이다. 이 두 버티는 힘이 빚어내는 긴장의 길항. 그리하여 갈까 말까 망설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예술가에게 선택 사항은 아니다. 어쩌면 작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둡고 모호하고 불안한 세계로부터 거절 불가능한 초청을 상시적으로 받는 존재일지도 모르니까. 강보라 소설은 생생함만큼의 불확실성에 닿아 있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생생함은 차갑고 딱딱하고 투명한 유형의 얼음이고 불확실성은 한 길 깊이만 되어도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는 무형의 물이라고 하겠다. 이 또한 필자의 말이 아니라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에 실린 단편 <빙점을 만지다>를 관통하는 비유다.
강보라 소설의 인물들을 보면 대개 얼음 쪽의 사람과 물 쪽의 사람으로 나뉜다. <티니안에서>의 따돌렸던 친구들 쪽(게스트하우스 주인 포함)과 따돌림당했던 여친구 삼총사 쪽,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의 재아와 호경, <신시어리 유어스>의 정단과 문규, <바우어의 정원>의 오디션 심사위원들과 은화 정림, <빙점을 만지다>의 동표와 해규, <직사각형의 찬미>의 남편과 이웃집 여자(포비 포함?),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의 (이미 녹기 시작한 얼음 같은) 주영과 민홍 이재. 이들은 각각 생생함의 불변과 불확실하고 낯선 가변을 담당한다. 그런데 그 두 부류를 꽃과 나비, 혹은 하늘과 땅으로 나누지 않고 얼음과 물로 나누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때에 따라 물이 얼음이 되듯 얼음도 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경계를 빙점이라고 하고, 강보라의 소설은 언제나 독자를 그 빙점으로 안내한다.
안내를 따라가는 독자는 마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존(Zone: 영화 <스토커>에 등장하는 미스터리한 구역)에 이르는 것만큼이나 서늘하고 아슬아슬하면서도 기대를 갖게 된다. DMZ를 지나 남북의 실질적 경계인 첨예한 군사분계선에 이르는 과정에도 비유될 수 있는 까닭은, 얼음과 물의 한계에 도달하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으며, 그곳에 다다른다 할지라도 그곳에 머물기는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살얼음 낀 맥주처럼 알맞은 상태로 쭉 가면 좋을 텐데 그게 잘 안 돼. 생활의 온도를 빙점인 상태로 유지하는 게…….”(209쪽 <빙점을 만지다>에서 해규의 말)
수용성이 떨어지는 데다 대류가 일어나지도 않는 고체 쪽은 아무래도 이쪽저쪽을 유연하게 살필 수 없는 지점이라 이야기 안에서 이를 아비투스와 (혹은 수입한) 오리엔탈리즘 등의 고정의식으로 확대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 안에 취향에 관련한 언급도 적지 않을 뿐 아니라 작품의 배경이 미국 등 외국인 경우가 많아서 작가가 이를 염두에 두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니까.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작가는 반영된 세계를 나름의 이미지로 포(고)착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나 이미지는 다른 한편 파라시오스의 베일처럼 그 뒤의 무언가를 감추기도 한다. 이를 두고 한 말인 듯, 베일이 감추는 것은 그 뒤의 무언가가 아니라 그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라고 말한 것은 니체다. 만일 니체가 더 자세히 말을 했다면 그 아무것도 없음은 말 그대로 허와 무이며, 그것으로부터(ex nihilo) 낯설지만 새로운 변화의 장이 열린다고 했을 터이므로, 강보라식으로 말하면 이미지 베일 뒤에 감추어진 허무는 빙점일 것이다. 그리고 이 빙점의 존재는 파라시오스의 그림처럼 생생한 이미지에 가려져 있을수록 결국엔 더 돌올해지고 만다는 사실을 강보라의 소설들은 보여준다.
서두에 강보라의 소설들이 어딘가 직접적인 데가 있고, 그것이 회화라면 물감의 돋을무늬마저 만져질 듯하다고 썼듯이, 그토록 생생한 베일로써 그 뒤의 존재론적 비밀을 노출시키는 작가의 재주가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이승우·소설가



소설가 이승우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공현진의 소설들을 읽는 동안 한때 유행했던 어떤 영화 대사가 생각났다. “뭣이 중한디.”
‘30년 안에 세상이 물에 잠기고’ 사람이 다 죽는다면, 어차피 곧 세상이 멸망한다면 연연해 할 것도 없고 마음 졸일 일도 없어진다. 그렇게 해서 생긴 마음의 어떤 상태를 가진 인물들이 공현진의 소설에 나온다. 생존을 위해 아등바등 경쟁하는 사람들 눈에 공현진 소설의 인물들이 어딘가 비상식적으로 보이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둔해 보이거나 무신경해 보이거나, 대책 없이 낙관적으로 보이거나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하는 이 인물들은 실은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와 ‘뭣이 중한디’의 마음을 내장한 이들이다. 어차피 인간은 죽는데, 라고 생각하면 화를 낼 일과 화를 낼 필요가 없는 일의 리스트가 달라진다. 관심 가질 일과 관심 갖지 않아도 될 일이 달라지고, 그 변화는 대개 그 마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소설집 속 인물들의, 표면적으로 너그러워 보이는 것 같은 어떤 태도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의 곽주호와 문희주, 「이름을 짓기 직전」의 석주, 「선자씨의 기적의 공부법」의 선자씨, 「돌아가는 마음」의 언니는 삶의 자리가 다르지만 한 인물의 다른 얼굴들처럼 읽힌다. 이 세상의 무의식적 관습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엉뚱하거나 약간 빗나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인물들은 공현진의 특징적인 캐릭터들이다. 캐릭터는 세계에 대한 인식과 동떨어진 채 존재할 수 없고 세계 인식은 소설 배경과 분리되지 않는 법. 가까워진 종말이 시대 배경이다. 이 배경은 인물의 세계관에 영향을 주고 삶의 태도를 바꾼다. “기후 위기는 윤리의 문제보다 희주의 생존 방식에 더 연결되었다.”라고 작가는 말하지만, 특이하게도 이 배경은 인물들을 윤리적으로 만든다. 그 과정은 이러하다. 꿀벌이 사라지면 세상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질 것이다. 꿀벌 무리와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체인처럼 고리로 연결되어 있고, 그 고리 끝에 자신이 매달려 있다는 인식에서 ‘책임감’이 불려 나온다. “그런데 나는 정말 책임이 없는 걸까?” 외국인 노동자의 사고로 괴로워하는 곽주호에게 부장은 네가 왜 난리냐고 묻는다. 평소 정의로운 사람도 가슴이 뜨거운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해왔던 곽주호는, 나는 책임이 없는 걸까? 라는 질문과 만난다. 그의 거의 모든 소설에서 서로에게 의지하거나 위로를 주고받는 인물들을 만난다. “어차피 세상은…”과 “뭣이 중한디”를 마음에 품은 사람에게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그런 심각하고 무거운 배경에도 불구하고 소설 속 이야기는 사소하고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어차피 멸망할 세상에서 이 인물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말 성실히 산다. 수영을 배우고 밴드를 만들고 진심을 다해 밴드의 이름을 짓는가 하면, 가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일에는 아버지가 목사인 교회에 와서, 5년 내내 예배를 드린다. 멸망을 ‘무서운 것이 아니라 위안으로’ 만든 것은 이 작가의 특출한 능력이다. 작가의 진심이 독자들에게 닿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근사한 이름을 갖기를 원하는 석주의 진심을 알아보는 「이름을 짓기 직전」의 ‘나’처럼 독자도 끝내 작가의 진심에 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소설들이 그 진심에 도달한 사람들의 상징적인 반응들을 나타내는 문장들로 마무리되는 점 또한 인상적이다. 예컨대 “겹겹이 포장지를 덧대어 한결 탐스럽고 풍성해진 꽃다발을 흔들며” 선자씨를 축하하러 거거나(「선자씨의 기적의 공부법」), 기도하는 중 눈을 떠서 움직이지 않고 같은 자리에 꼭 붙어 있는 손들을 보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고 느끼거나(「돌아가는 마음」), 수영장 안에서 손안에 들어오는 물을 움켜쥐며 두 사람은 갈 수 있는 만큼 간다(「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그리고, “나는 양손을 오므려 주먹을 쥐어 보았다. 이런 걸 변화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주먹을 쥐고 서 있었다.”(「이름을 짓기 직전」).
김인숙·소설가



소설가 김인숙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 8편의 단편소설을 실은 공현진의 소설집 제목이다. 표제작이 된 이 단편소설은 수영장에서 만난 두 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보통의 수영장, 평범한 강습 시간의 풍경인데 인상적인 구절들이 나온다. “인간의 진화는 실패한 게 아닐까” “어차피 우리는 모두 물에 잠길 거다” “내가 대단한 사람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이야. 평범해서 다행이다.” “같이 떠내려가는 것, 같이 잠기고 같이 사라지는 것” “잘 떠있고 싶었다. 더 둥둥 떠있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나는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 이쯤에서 다시 제목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이 어차피 멸망할 거라는 건 사실일까, 감각일까. 사실이라면 그것은 물리적인 세계에 관한 것일까 아니면 세상의 도덕에 관한 것일까. 책임을 져야 한다면 그 어떤 것에 대한 걸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다른 단편소설에서 주어진다. 소설집의 마지막 수록작인 ‘모두가 사라진 후에-3인칭의 세계’에서다. 이 소설에는 매우 비범한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인류의 종말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 “인간은 자신들이 결국에는 사라져야 할 종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그 후 인류는 종말의 방법을 모색하게 되는데, 그 기준이 뜻밖에도 ‘가장 도덕적인’ 것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한순간의 종말 대신 서서히 진행되는 소멸. 그러나 목적이 확고부동한, 단호한 소멸. 도덕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더는 존재할 가치조차 없게 되었다고 스스로를 판단한 인류치고는 너무 고상한 방식이 아닌가. 혹시 이 인간이라는 종에게는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게 아닐까.
공현진의 소설이 보여주는 것은 ‘남아 있는 질문’이다. 세상이 멸망한 후에도, 인류가 스스로 절멸해버린 후에도, 애증으로 묶여 있던 누군가가 죽거나 영원히 돌아오지 않게 된 후에도, 소설 속에는 질문이 남는다. 나는 얼마나 책임이 있는 것일까라는.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은 결국 희망이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할 터이다.
다시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로 돌아오면, 작중 인물인 희주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하고, 환경 문제를 고민하고, 사회적인 비극에 깊은 아픔을 느끼는 사람이다. 또 한 사람의 인물인 주호는 자신이 관리직으로 근무하는 공장에서 노동자가 사망한 후, 한 사람이 그런 식으로 죽었는데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는 세상에 대해 좌절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리고 마지막 소설 속에 등장하는 ‘하나’가 있다. 모든 걸 기록하기 위해 남겨진 단 하나의 사람, ‘하나’. 미니멀리즘에 집착하는 희주거나, 공장의 기계를 꺼버리는 주호나, 기록자로 홀로 남겨진 하나거나 그들이 기대고 있는 것은 ‘어차피 세상은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적어도, 오늘은 그렇다. 그러므로 살아야 한다.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도 너무나 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것이 공현진의 소설 속 세계이다.
김동식·문학평론가



김동식 문학평론가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
예술가 소설은 예술가의 삶과 관련된 사건들을 중심 테마로 다룬 소설을 말한다. 여기서 예술가는 작가, 문인, 음악가, 화가 등과 같은 고전적인 범주의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가수, 배우 등과 같은 대중예술가도 포함된다. 예술가 소설은 예술가라는 탈속(脫俗)적인 주체의 삶에 주목하는 과정에서 예술가를 둘러싸고 있는 세속적인 사회의 억압적인 모습들이 함께 드러나게 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노트를 들고 경성의 거리를 산책하며 소설의 소재를 찾아다녔던 소설가 구보와, 황금광이 되어 젊은 처자를 대동하고 카페를 전전하는 중학 동창이 등장하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예술가 소설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21세기가 4분의 1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예술가 소설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 있을까. 강보라의 작품집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21세기의 예술가 소설이라는 호칭이 그다지 무색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전반적으로 보자면 강보라의 소설에서는 보헤미안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의 예술가들 또는 보보스(보헤미안과 부르주아를 결합한 삶의 양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문화예술 관련 종사자들에게 주목하고 있다.
상품과 자본으로 대변되는 세속적인 가치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창조로 대변되는 탈속적인 삶의 가능성을 찾아 움직여 나가는 보헤미안적 삶에 있어서, 예술과 문화는 삶의 근원적인 가치이자 원리에 해당한다. 직장에 다니다가도 밥벌이의 구속을 벗어던지고 섬이나 오지로 떠나서 자유를 느끼고 유목민처럼 이동해 가면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자 하는 사람들, 또는 몸은 대도시의 공간 속에 놓여 있지만, 예술과 문화가 송신하는 자유와 해방의 기호들을 자신들의 취향을 통해서 실천 내지는 수행의 영역으로 옮겨 놓는 사람들. 강보라는, 이제는 TV나 유튜브 등과 같은 미디어들을 통해서 상당히 친숙해진 삶의 양식인, 보헤미안적 삶 또는 보보스적 삶을 섬세하게 관찰하며 21세기의 예술가 소설을 제시하고 있다.
표제작인 단편 <양배추가 있는 풍경>은 발리를 배경으로 보헤미안적인 삶, 보보스적인 삶, 그리고 셀러브리티의 삶을 제시하며 오늘날 예술은 어디에 있는지, 예술을 둘러싸고 있는 세속적인 세계는 어떠한 방식으로 예술과 문화의 영역을 가로지르고 있는지, 예술과 문화의 영역을 기능적으로 구조화하고 있는 숨은 가치는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 화자는 재아. 문화예술 관련 저술을 집필하며 유복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 8년 만에 발리를 방문했다. 요가를 통해 신체적·정신적 자유로움에 도달하자고 주장하는 세계적인 셀럽인 애나 패서디나의 요가 워크숍에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그녀가 리모아 캐리어를 끌고 어울리지도 않게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했고, 그곳에서 체류하고 있는 오반장, 기호, 호경을 만난다. 이들은 경제적 자본도 없고 문화적 상징자본도 없는 보헤미안적 예술가들이었고, 그들의 눈에 재아는 부르주아였다.
이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오 반장은 빚을 지고 돌아다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반장 역할을 하며 탈속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이었고, 기호는 오지의 가난한 어린이를 사진으로 찍으면 그 어떤 사회적 각성이 생길 것이라는 판타지를 간직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였고, 20대 젊은 여성인 호경은 오 반장의 애인으로 보이는데 삶과 예술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자유로움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가. 삶의 예술적 가능성들이 발리의 누추한 게스트하우스와 그곳에 모여든 사람들로부터 생겨났던가. 확실한 것은 그곳 발리에는 세계적인 셀럽(애나)과 충분한 경제력을 갖춘 보보스(재아)와 경제력과 문화적 상징자본도 없는 보헤미안들(오 반장, 기호, 호경)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계급적 서열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위선적이었다. 동양의 요가를 통해 세계적인 셀럽이 된 애나는 동양적인 것들과 취향이 맞지 않았고, 재아는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라는 애나의 요가에는 공감하면서도 발리에서 살아가는 보헤미안들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리고 발리의 보헤미안들은 서울의 구속과 억압이 싫어서 발리의 가난한 자유로움을 선택한 것으로 포장하고는 있지만 그 숨겨진 내면에는 서울로 돌아가 예술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과 자유를 추구하는 보헤미안 예술가와 예술 관련 종사자들이 모여들었던 발리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발리에서 호경이 재아에게 선물한 그림이 힌트가 될 것이다. 뱀과 양배추가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 그림은, 관계를 창출하는 공존이나 연대가 아니라, 그냥 나란히 있을 따름인 병치나 병존을 보여주고 있다.
예술이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말자. 오늘날 예술은 존재들 사이의 아름다운 병치, 별다른 관계없이 그냥 나란히 있기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예술가나 예술 종사자들이 욕망하는 것 역시 바로 그 병치의 지점이라는 점을, 강보라의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예술을 위한 짧은 변명이 허용된다면, 예술이 이 지점에 이른 것은 어쩌면 예술을 둘러싸고 있는 세속적 사회의 논리와 억압이 정교하게 예술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 정도의 이야기라면, 다시 한번 뱀과 양배추가 병치되어 있는 풍경을 들여다본다고 하더라도, 문학상 심사를 위해서는 괜찮은 일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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