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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태용 전 울산HD 감독이 9일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열린 제주 SK와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한국프로축구연맹 제공
"나는 바지 감독이었다."
프로축구 K리그1 울산HD의 소방수로 투입됐다 2개월여 만에 경질된 신태용의 한마디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불과 두 달 전 울산 지휘봉을 잡을 때만 해도 "믿고 응원해주면 우승은 못해도 최소한 거기에 근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울산의 시그니처 포즈인 '어흥'을 외쳤던 그는 원정 골프, 선수단 불화 등 잡음 속에 씁쓸히 지휘봉을 내려놔야 했다. 경질 후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고 적극 해명했지만, 이미 엎어진 일들을 되돌릴 순 없었다.
빛나는 커리어로 선수 시절 4금융권 부터 '레전드' 칭호를 받고, 감독으론 여러 차례 '기적'을 썼던 신태용의 파란만장한 축구 인생을 '이달의 스포츠 핫 피플'에서 돌아봤다.
2003년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정규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성남 김도훈(왼쪽)과 정규리그 우승컵을 든 신태용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 제2금융권무직자대출
성남 전성기 이끈 '레전드 오브 레전드'
기술적이고 영리한 플레이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어 '그라운드의 여우'라 불린 신태용은 "입단 때부터 전성기"였다는 그의 말대로 시작부터 남달랐다. 1992년 영남대 졸업 후 일화 천마(현 성남FC)에 입단한 첫해부터 10 sbi저축은행 합병 골 5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에 힘을 보태고 신인상을 거머쥐더니 이후 3년간 'K리그 최초 3연패(1993, 1994, 1995년)' 위업을 달성했다. 1995년엔 20득점 20도움으로 리그 최우수선수(MVP)에 꼽히는 영예도 안았다. 일화 천마는 그해 창단 이래 처음으로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까지 제패하며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했다.
방빼기
2002년 선수 시절 신태용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번 발동이 걸린 신태용의 발은 멈출 줄을 몰랐다. 1996년엔 21골 3도움을 올려 득점왕에 우뚝 섰다.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신인왕, 득점왕, MVP를 모두 수 폭스바겐 파이낸셜 상한 건 신태용, 이동국, 정조국 3명뿐이다. 2001년엔 일화의 두 번째 리그 3연패와 함께 통산 50(득점)-50(도움) 클럽에 가입하더니 2003년엔 K리그 역대 최초로 60-60 기록을 썼다.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로, 선수로는 고령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쌩쌩했다. 급기야 선수 생활 마지막 해였던 2004년엔 K리그 최초로 통산 400경기(연말 기준 405경기) 출장 대기록을 세워 기록 제조 행진을 이어갔다.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대표팀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16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으로 선발돼 일찍이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성인이 된 후론 좀처럼 부름을 받지 못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을 2년 앞둔 1992년 아랍에미리트와의 평가전을 통해 성인 대표팀에 데뷔하고도 정작 월드컵 최종 엔트리엔 들지 못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때라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몇 년 뒤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는 이 시기를 선수 시절 가장 힘들었던 때로 꼽으며 "충격받아 잠수를 타고 아예 축구와 담을 쌓으려고 했을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이후로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에 모두 출전하지 못했다.
선수 시절 신태용. 한국일보 자료사진
숱한 일화 남긴 '그라운드의 여우'
기록도 기록이지만, 신태용 팬들이 그의 이력을 곱씹으며 가장 많이 떠올리는 건 각종 일화다. '낭만 축구'를 지향했던 그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이 남겼다. 통산 99골 은퇴 일화가 대표적이다. 신태용은 2004년 8월 초 개인 통산 99골을 달성한 뒤 팬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다. 100호 골을 필드골로 장식하기 위해 페널티킥을 사절한다는 것과 100호 골을 넣을 때까지 수염을 깎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낭만파'다운 발상이었다.
경기가 많이 남아있던 탓에 그의 통산 100골 달성은 당연한 것으로 예상됐다. 신태용 또한 "설마 올 시즌 안에 못 넣겠냐"며 낙관했지만, 하늘은 무심했다. 100호골 고지를 놓고 경쟁하던 같은 팀의 동갑내기 김도훈에게 페널티킥을 양보하다 결국 김도훈이 그해 10월 먼저 100호골을 넣었고, 신태용은 마지막 한 골을 넣지 못한 채 선수생활을 은퇴했다. 수염은 두 달가량 기르다 조금씩 다듬더니 400번째 경기 출장을 앞두고 미련 없이 밀어버렸다. 최근 한국프로축구연맹이 누락된 기록들을 복원하면서 기록이 102골로 정정돼 뒤늦게 100골 고지를 밟았다.
일본 진출을 거부한 일화도 유명하다. 1990년대엔 고정운을 필두로 홍명보, 황선홍, 하석주 등 내로라하는 대표팀 선수들이 줄줄이 J리그로 향할 때였고, 신태용 또한 J리그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연봉이 맞지 않기도 했지만 "한국 MVP는 일본에 가지 않는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렇게 그는 영원한 '성남의 원클럽맨'으로 남았다.
성남 일화 신태용 감독 대행이 2008년 성남구장에서 취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난 놈'의 등장... 대표팀에선 '특급 소방수'로 맹활약
2005년 초 성남과 재계약에 실패한 신태용은 호주 프로축구 퀸즐랜드 로어FC에서 기술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몇 년간 갈고닦은 실력은 2008년 말 성남 일화 천마 감독 대행으로 부임하면서 빛을 발했다. 4년 만에 돌아온 '성남의 전설'은 "프로에서 2등은 필요 없다. 초보 감독도 우승할 수 있다"며 당찬 취임 일성을 밝혔고, 그 약속을 지켰다. 이듬해 리그 준우승을 달성하며 '대행' 딱지를 떼더니 2010년 기어이 일을 치고 말았다. 무려 15년 만에 성남을 AFC 챔피언스리그 정상으로 이끈 것. 우승 직후 밝힌 "나는 정말 '난 놈'이다"라는 소감 덕분에 아직까지도 그에겐 '난 놈' 수식어가 따라붙고 있다. 2011년엔 FA컵(현 코리아컵)에서 숙적 수원 삼성을 꺾고 팀에 두 번째 FA컵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2018년 6월 30일 한국일보 지면
신태용은 감독이 된 뒤에야 대표팀과 진한 인연을 맺었다. 그는 한국 축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소방수 역할을 맡았다. 2015년 1월 고(故) 이광종 당시 23세 이하(U-23) 대표팀 감독이 병마로 물러나면서 지휘봉을 잡은 게 시작이었다. 신태용은 이듬해 리우 올림픽 8강행을 이끌며 눈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그해 12월 또 다른 특명이 떨어졌다.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안익수 감독 후임으로 20세 이하(U-20) 대표팀을 맡게 된 것. U-20 월드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진화작업에 나선 신태용은 2017년 U-20 월드컵에서 16강행을 지휘하며 또 한 번 멋진 마무리를 해냈다.
그런 그가 '특급 소방수'로 거듭난 건 2018 러시아 월드컵 때다.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앞두고 A대표팀을 이끌던 올리 슈틸리케 감독이 월드컵 최종예선 부진 등으로 물러나면서 신태용에게 기회가 왔다. 선수 때 월드컵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월드컵 감독을 맡냐는 우려와 지적이 쏟아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 결과는 화려했다. 최종예선에서 조2위로 본선에 오른 신태용호는 1, 2차전 연패 후 3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2-0으로 격파하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비록 16강 진출엔 실패했지만, 경기 도시 이름을 따 '카잔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날 승리로 한국은 국제 무대에서 자신감을 채울 수 있었다.
신태용(맨 오른쪽 두 번째) 전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이 지난해 4월 25일 카타르 도하 압둘라 빈 칼리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의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아시안컵 8강전에서 승리한 뒤 한국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카타르=뉴시스
인도네시아서 기적 일구고 국내로 복귀
카잔의 기적으로 감독으로서 자질을 확실하게 보여준 신태용의 다음 행선지는 인도네시아였다. 그는 2020년 1월 인도네시아 축구대표팀 수장을 맡아 시작부터 굵직한 성과를 냈다. 부임 첫해 2020 동남아시아축구연맹(AFF) 챔피언십(스즈키컵) 준우승을 했고, 이듬해엔 동남아시안게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23 카타르 아시안컵에선 또 한 번 기적을 썼다. 2007년 이후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것도 모자라 조별리그 D조 3위로 16강 진출이란 쾌거를 달성했다. 지난해엔 사상 첫 올림픽 본선 무대도 내다봤다. 비록 2024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은 아쉽게 실패했지만, 사상 최초로 대륙 간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며 역대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인도네시아는 아시아 약체 팀 중 하나로 꼽혔던 자국 팀을 단숨에 강팀으로 만든 '신태용 매직'의 달콤한 결과물에 푹 빠져든 듯했지만, 올해 초 동남아 축구 최강자를 가리는 미쓰비시컵 4강 진출 실패 등을 이유로 신태용과 결별했다.
신태용 울산HD 전 감독이 지난달 4일 서울 축구회관에서 열린 2025~26 ACL 참가 K리그 4개팀 미디어데이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찬 바람 불면 치고 올라간다" 했지만...
지난 4월 성남 비상근 단장으로 선임되며 국내 무대에 복귀한 신태용은 4개월 뒤 김판곤 울산 감독의 후임으로 13년 만에 프로팀 사령탑에 부임했다. 지휘봉을 잡고 생각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자 "찬 바람 불 때는 치고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라며 내심 기대를 부풀렸지만, 막상 찬바람이 불자 그에게 날아든 건 경질 통보였다.
표면적 이유는 강등권으로 떨어진 팀 성적이지만, 축구계에선 그간 줄줄이 터져 나온 각종 논란을 경질 배경으로 보고 있다. 원정 가는 길에 골프를 쳤다거나 선수를 폭행했다는 등의 논란이다. 신태용은 경질 직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 골프채는 아들에게 전해주려 가져간 것일 뿐 원정 경기를 앞두고 골프를 치지 않았으며, 선수를 폭행한 사실도 없다는 것이다. 일부 고참 선수들과의 불화는 일부 인정하면서도 "선발로 못 나오니 불평,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엔 "나의 패착이 가장 크다.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특급 소방수' 신태용의 이번 진화작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를 밑거름 삼는다면 위기마다 돌아오던 그의 '복귀 본능'이 언젠가 또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것으로 보인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나는 바지 감독이었다."
프로축구 K리그1 울산HD의 소방수로 투입됐다 2개월여 만에 경질된 신태용의 한마디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불과 두 달 전 울산 지휘봉을 잡을 때만 해도 "믿고 응원해주면 우승은 못해도 최소한 거기에 근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울산의 시그니처 포즈인 '어흥'을 외쳤던 그는 원정 골프, 선수단 불화 등 잡음 속에 씁쓸히 지휘봉을 내려놔야 했다. 경질 후 "모두 사실이 아니다"라고 적극 해명했지만, 이미 엎어진 일들을 되돌릴 순 없었다.
빛나는 커리어로 선수 시절 4금융권 부터 '레전드' 칭호를 받고, 감독으론 여러 차례 '기적'을 썼던 신태용의 파란만장한 축구 인생을 '이달의 스포츠 핫 피플'에서 돌아봤다.
2003년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정규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성남 김도훈(왼쪽)과 정규리그 우승컵을 든 신태용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뉴시스 제2금융권무직자대출
성남 전성기 이끈 '레전드 오브 레전드'
기술적이고 영리한 플레이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어 '그라운드의 여우'라 불린 신태용은 "입단 때부터 전성기"였다는 그의 말대로 시작부터 남달랐다. 1992년 영남대 졸업 후 일화 천마(현 성남FC)에 입단한 첫해부터 10 sbi저축은행 합병 골 5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에 힘을 보태고 신인상을 거머쥐더니 이후 3년간 'K리그 최초 3연패(1993, 1994, 1995년)' 위업을 달성했다. 1995년엔 20득점 20도움으로 리그 최우수선수(MVP)에 꼽히는 영예도 안았다. 일화 천마는 그해 창단 이래 처음으로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까지 제패하며 명문 구단으로 발돋움했다.
방빼기
2002년 선수 시절 신태용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번 발동이 걸린 신태용의 발은 멈출 줄을 몰랐다. 1996년엔 21골 3도움을 올려 득점왕에 우뚝 섰다.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신인왕, 득점왕, MVP를 모두 수 폭스바겐 파이낸셜 상한 건 신태용, 이동국, 정조국 3명뿐이다. 2001년엔 일화의 두 번째 리그 3연패와 함께 통산 50(득점)-50(도움) 클럽에 가입하더니 2003년엔 K리그 역대 최초로 60-60 기록을 썼다. 당시 그의 나이는 34세로, 선수로는 고령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쌩쌩했다. 급기야 선수 생활 마지막 해였던 2004년엔 K리그 최초로 통산 400경기(연말 기준 405경기) 출장 대기록을 세워 기록 제조 행진을 이어갔다.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대표팀과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16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으로 선발돼 일찍이 태극마크를 달았지만, 성인이 된 후론 좀처럼 부름을 받지 못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을 2년 앞둔 1992년 아랍에미리트와의 평가전을 통해 성인 대표팀에 데뷔하고도 정작 월드컵 최종 엔트리엔 들지 못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그라운드를 누비던 때라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몇 년 뒤 한국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는 이 시기를 선수 시절 가장 힘들었던 때로 꼽으며 "충격받아 잠수를 타고 아예 축구와 담을 쌓으려고 했을 정도였다"고 털어놨다. 이후로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 등에 모두 출전하지 못했다.
선수 시절 신태용. 한국일보 자료사진
숱한 일화 남긴 '그라운드의 여우'
기록도 기록이지만, 신태용 팬들이 그의 이력을 곱씹으며 가장 많이 떠올리는 건 각종 일화다. '낭만 축구'를 지향했던 그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많이 남겼다. 통산 99골 은퇴 일화가 대표적이다. 신태용은 2004년 8월 초 개인 통산 99골을 달성한 뒤 팬들에게 두 가지를 약속했다. 100호 골을 필드골로 장식하기 위해 페널티킥을 사절한다는 것과 100호 골을 넣을 때까지 수염을 깎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낭만파'다운 발상이었다.
경기가 많이 남아있던 탓에 그의 통산 100골 달성은 당연한 것으로 예상됐다. 신태용 또한 "설마 올 시즌 안에 못 넣겠냐"며 낙관했지만, 하늘은 무심했다. 100호골 고지를 놓고 경쟁하던 같은 팀의 동갑내기 김도훈에게 페널티킥을 양보하다 결국 김도훈이 그해 10월 먼저 100호골을 넣었고, 신태용은 마지막 한 골을 넣지 못한 채 선수생활을 은퇴했다. 수염은 두 달가량 기르다 조금씩 다듬더니 400번째 경기 출장을 앞두고 미련 없이 밀어버렸다. 최근 한국프로축구연맹이 누락된 기록들을 복원하면서 기록이 102골로 정정돼 뒤늦게 100골 고지를 밟았다.
일본 진출을 거부한 일화도 유명하다. 1990년대엔 고정운을 필두로 홍명보, 황선홍, 하석주 등 내로라하는 대표팀 선수들이 줄줄이 J리그로 향할 때였고, 신태용 또한 J리그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연봉이 맞지 않기도 했지만 "한국 MVP는 일본에 가지 않는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그렇게 그는 영원한 '성남의 원클럽맨'으로 남았다.
성남 일화 신태용 감독 대행이 2008년 성남구장에서 취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난 놈'의 등장... 대표팀에선 '특급 소방수'로 맹활약
2005년 초 성남과 재계약에 실패한 신태용은 호주 프로축구 퀸즐랜드 로어FC에서 기술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몇 년간 갈고닦은 실력은 2008년 말 성남 일화 천마 감독 대행으로 부임하면서 빛을 발했다. 4년 만에 돌아온 '성남의 전설'은 "프로에서 2등은 필요 없다. 초보 감독도 우승할 수 있다"며 당찬 취임 일성을 밝혔고, 그 약속을 지켰다. 이듬해 리그 준우승을 달성하며 '대행' 딱지를 떼더니 2010년 기어이 일을 치고 말았다. 무려 15년 만에 성남을 AFC 챔피언스리그 정상으로 이끈 것. 우승 직후 밝힌 "나는 정말 '난 놈'이다"라는 소감 덕분에 아직까지도 그에겐 '난 놈' 수식어가 따라붙고 있다. 2011년엔 FA컵(현 코리아컵)에서 숙적 수원 삼성을 꺾고 팀에 두 번째 FA컵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2018년 6월 30일 한국일보 지면
신태용은 감독이 된 뒤에야 대표팀과 진한 인연을 맺었다. 그는 한국 축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소방수 역할을 맡았다. 2015년 1월 고(故) 이광종 당시 23세 이하(U-23) 대표팀 감독이 병마로 물러나면서 지휘봉을 잡은 게 시작이었다. 신태용은 이듬해 리우 올림픽 8강행을 이끌며 눈도장을 찍었다. 그러자 그해 12월 또 다른 특명이 떨어졌다.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안익수 감독 후임으로 20세 이하(U-20) 대표팀을 맡게 된 것. U-20 월드컵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진화작업에 나선 신태용은 2017년 U-20 월드컵에서 16강행을 지휘하며 또 한 번 멋진 마무리를 해냈다.
그런 그가 '특급 소방수'로 거듭난 건 2018 러시아 월드컵 때다. 9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앞두고 A대표팀을 이끌던 올리 슈틸리케 감독이 월드컵 최종예선 부진 등으로 물러나면서 신태용에게 기회가 왔다. 선수 때 월드컵 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월드컵 감독을 맡냐는 우려와 지적이 쏟아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다. 도리어 마음을 더 굳게 먹었다. 결과는 화려했다. 최종예선에서 조2위로 본선에 오른 신태용호는 1, 2차전 연패 후 3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독일을 2-0으로 격파하는 대이변을 일으켰다. 비록 16강 진출엔 실패했지만, 경기 도시 이름을 따 '카잔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날 승리로 한국은 국제 무대에서 자신감을 채울 수 있었다.
신태용(맨 오른쪽 두 번째) 전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이 지난해 4월 25일 카타르 도하 압둘라 빈 칼리파 스타디움에서 열린 한국과의 2024 아시아축구연맹(AFC) U-23 아시안컵 8강전에서 승리한 뒤 한국 선수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카타르=뉴시스
인도네시아서 기적 일구고 국내로 복귀
카잔의 기적으로 감독으로서 자질을 확실하게 보여준 신태용의 다음 행선지는 인도네시아였다. 그는 2020년 1월 인도네시아 축구대표팀 수장을 맡아 시작부터 굵직한 성과를 냈다. 부임 첫해 2020 동남아시아축구연맹(AFF) 챔피언십(스즈키컵) 준우승을 했고, 이듬해엔 동남아시안게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2023 카타르 아시안컵에선 또 한 번 기적을 썼다. 2007년 이후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한 것도 모자라 조별리그 D조 3위로 16강 진출이란 쾌거를 달성했다. 지난해엔 사상 첫 올림픽 본선 무대도 내다봤다. 비록 2024 파리 올림픽 본선 진출은 아쉽게 실패했지만, 사상 최초로 대륙 간 플레이오프까지 진출하며 역대 최고의 성적을 기록했다.
인도네시아는 아시아 약체 팀 중 하나로 꼽혔던 자국 팀을 단숨에 강팀으로 만든 '신태용 매직'의 달콤한 결과물에 푹 빠져든 듯했지만, 올해 초 동남아 축구 최강자를 가리는 미쓰비시컵 4강 진출 실패 등을 이유로 신태용과 결별했다.
신태용 울산HD 전 감독이 지난달 4일 서울 축구회관에서 열린 2025~26 ACL 참가 K리그 4개팀 미디어데이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시스
"찬 바람 불면 치고 올라간다" 했지만...
지난 4월 성남 비상근 단장으로 선임되며 국내 무대에 복귀한 신태용은 4개월 뒤 김판곤 울산 감독의 후임으로 13년 만에 프로팀 사령탑에 부임했다. 지휘봉을 잡고 생각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자 "찬 바람 불 때는 치고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라며 내심 기대를 부풀렸지만, 막상 찬바람이 불자 그에게 날아든 건 경질 통보였다.
표면적 이유는 강등권으로 떨어진 팀 성적이지만, 축구계에선 그간 줄줄이 터져 나온 각종 논란을 경질 배경으로 보고 있다. 원정 가는 길에 골프를 쳤다거나 선수를 폭행했다는 등의 논란이다. 신태용은 경질 직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이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 골프채는 아들에게 전해주려 가져간 것일 뿐 원정 경기를 앞두고 골프를 치지 않았으며, 선수를 폭행한 사실도 없다는 것이다. 일부 고참 선수들과의 불화는 일부 인정하면서도 "선발로 못 나오니 불평, 불만이 터져나오는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엔 "나의 패착이 가장 크다.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며 고개를 숙였다.
'특급 소방수' 신태용의 이번 진화작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를 밑거름 삼는다면 위기마다 돌아오던 그의 '복귀 본능'이 언젠가 또 빛을 발하는 날이 올 것으로 보인다.
김진주 기자 pearlkim7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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